막스 자코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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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스 자코브는 1876년 프랑스 캥페르에서 태어난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며, 20세기 초 프랑스 문학과 예술계에 큰 영향을 미친 시인, 소설가, 평론가, 화가이다. 그는 파블로 피카소, 기욤 아폴리네르 등과 교류하며 큐비즘, 초현실주의 운동에 기여했고, 다양한 문학 작품과 미술 평론을 발표했다. 1909년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생 베누아 쉬르 루아르 수도원에서 은둔 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드랑시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그의 작품은 시집 《주사위 통》, 소설 《성 마토렐》 등이 있으며, 20세기 프랑스 예술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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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자코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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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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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막스 자코브 알렉상드르 |
다른 이름 | 레옹 다비드 모르벤 르 가엘리크 |
출생 | 1876년 7월 12일 |
출생지 | 프랑스, 브르타뉴, 피니스테르 주, 캥페르 |
사망 | 1944년 3월 6일 |
사망지 | 프랑스, 일드프랑스, 센생드니 주, 드랑시 드랑시 수용소 |
묻힌 곳 | 프랑스, 상트르발드루아르, 루아레 주, 생브누아쉬르루아르 묘지 |
국적 | 프랑스 |
직업 | 시인 소설가 극작가 화가 미술 평론가 |
언어 | 프랑스어 |
교육 | 법학 학사 |
경력 | |
활동 기간 | 1904년 - 1939년 |
사조 | 퀴비스므 |
주요 작품 | 『주사위 통』 『중앙 실험실』 『발라드』 마트렐 3부작 |
수상 |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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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브르타뉴 지방 캥페르 출신으로,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낸 후 1897년 예술가의 길을 걷기 위해 파리로 이주했다. 파리에서 파블로 피카소와 가장 먼저 친구가 된 인물 중 하나로, 1901년 여름에 만나 피카소가 프랑스어를 배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1] 이후 볼테르 대로에서 피카소와 함께 살기도 했으며,[2] 피카소와는 평생 친구로 지냈다. 자코브는 피카소에게 기욤 아폴리네르를 소개했고, 아폴리네르는 다시 조르주 브라크를 소개해주는 등 몽마르뜨 예술가 공동체의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그는 장 콕토, 장 위고, 크리스토퍼 우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등 당대의 여러 예술가와 교류했으며, 훗날 레지스탕스 지도자가 되는 장 물랭(예술가 시절 이름 로마냉)과도 친구가 되어 그를 격려했다.
원래 유대인이었으나, 1909년 그리스도의 환영을 보았다고 주장하며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는 이 개종이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고 전해진다.[3]
자코브는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사이의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산문 시집 ''Le cornet à dés'' (''주사위 상자'', 1917), 소설 ''Saint Matorel'' (1911), 자유시 ''Le laboratoire central'' (1921), 그리고 그의 철학적, 종교적 관점을 담은 ''La défense de Tartuffe'' (1919) 등이 있다.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은 "진실은 항상 새롭다"는 말을 자코브에게서 인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
1936년 5월, 그는 파리 생활을 정리하고 루아레의 생-브누아-쉬르-루아르에 정착하여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4년 2월 24일,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오를레앙 감옥에 수감되었다.[5] 그의 형 가스통과 누이 미르트-레아 역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는 등 가족들이 나치의 박해를 받았다.[6] 자코브는 오를레앙 감옥에서 드랑시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아우슈비츠로 이송될 예정이었으나 이송 직전인 1944년 3월 5일, 수용소 내 병원에서 기관지 폐렴으로 사망했다.[7]
전쟁 후 그의 유해는 친구들의 노력으로 1949년 생-브누아-쉬르-루아르의 묘지로 이장되었다.[6]
2. 1. 유년 시절과 교육
막스 자코브는 1876년 7월 12일, 브르타뉴 지방 피니스테르주의 캉페르에서 라자르 알렉상드르와 프뤼당스 알렉상드르(결혼 전 성은 야코브) 사이에서 넷째 아들 막스 자코브 알렉상드르로 태어났다.그의 조부 사무엘 알렉상드르는 자르란트 주 노인키르헨에서 1811년에 태어난 독일 국적의 유대인이었다. 그는 프랑스로 이주하여 상업에 종사하며 미르테 레아 마이어와 결혼했다.[9] 알렉상드르 부부는 프랑스 북부를 거쳐 1858년경 캉페르에 정착했다.[9][10] 알렉상드르 가문은 재단사로서 크게 성공하여, 브르타뉴 지방의 스케르, 프로알레, 퐁-라베 등의 전통 의상을 제작했고,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출품하기도 했다.[9]
막스의 아버지 라자르 자코브와 삼촌 모리스는 보불 전쟁(1870-1871년)에서의 공훈을 인정받아 1873년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10] 라자르 자코브는 가업인 재단사를 이어받았고, 1871년 파리 출신의 프뤼당스 자코브와 결혼했다. 막스에게는 누나 줄리 델핀(1872년생), 형 모리스(1874년생)와 가스통 자코브(1875년생), 남동생 자크 자코브(1880년생), 여동생 미르테 레아 자코브(1884년생)와 쥐잔느(1887년생) 등 6명의 형제자매가 있었다.[9]
1888년, 알렉상드르 가문은 투르 행정 법원에 성씨를 '야코브'로 변경해달라고 신청하여 허가를 받았다. 이는 로리앙에서 공동으로 사업을 하던 야코브 가문과 성씨를 통일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전해진다. 이로 인해 막스 자코브 알렉상드르는 막스 자코브로 불리게 되었다(이름 '자코브'는 성과 중복되어 삭제됨).[9][11]
자코브 가문은 유대교 신자였으나 예배와 같은 종교 의식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막스 자신은 가톨릭에 대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할아버지 사무엘에게 배운 유대 문화와 독일 문화, 그리고 브르타뉴 지방의 풍토는 훗날 그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10]
막스는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였지만, 행동이 느리고 주의력이 부족하여 부모를 걱정시켰다. 이 때문에 14세 무렵 파리의 저명한 신경과 의사 장 마르탱 샤르코에게 상담을 받고 약 1년간 파리에서 요양하기도 했다.[12] 캉페르로 돌아온 후, 리세(고등학교)에서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교사들의 기대를 받았으며, 독서에 몰두하는 한편 음악과 회화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10] 1894년(18세)에 우등상을 받고 리세를 졸업하며 바칼로레아(대학 입학 자격 시험)를 취득했다. 이후 식민지 행정관을 양성하는 파리의 식민 학교(훗날 국립행정학교에 통합됨)에 입학했으나, 3년 만에 자퇴하고 캉페르로 돌아가 가족들을 실망시켰다.[13][14]
1897년, 다시 파리로 돌아와 법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듬해인 1898년부터는 외할아버지 레옹 다비드의 이름을 빌려 Le Moniteur des arts프랑스어(예술 지도자)라는 잡지에 미술 평론을 기고하기 시작했다.[15][16] 하지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가구 직공의 조수, 창고 관리인, 가정교사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17]
2. 2.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 시절
브르타뉴 지방 캥페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막스 자코브는 1897년 예술가의 꿈을 안고 파리로 이주하여 식민 학교에 입학했다. 1901년 여름, 그는 파리에서 파블로 피카소를 처음 만난 친구 중 한 명이 되었으며, 피카소가 프랑스어를 배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1] 1901년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화랑에서 열린 피카소의 첫 개인전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자코브는 훗날 피카소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를 "나에게 예술의 세계 그 자체였다"고 표현했다.[18] 1902년부터 피카소는 자코브가 살던 파리 11구 Boulevard Voltaire|볼테르 대로프랑스어의 아파트에서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2][17] 피카소는 자코브에게 평생의 친구가 되었으며, 1921년 작품 ''세 명의 음악가''에서 자코브를 수도승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자코브는 피카소에게 기욤 아폴리네르를 소개했고, 아폴리네르는 다시 조르주 브라크를 피카소에게 연결해주었다.자코브와 피카소는 이탈리아 화가이자 소설가인 Ardengo Soffici|아르덴고 소피치프랑스어를 통해 문학·예술 잡지 『La Plume|라 플룸프랑스어』에 기고했으며,[19] 곧 몽마르뜨 언덕에 위치한 허름한 목조 건물 "세탁선"으로 이주했다. 이곳은 소피치 등 이탈리아 화가들과 스페인 화가들, 그리고 당시 가난했던 외국인 예술가들의 주요 거처였다. 난방 시설도 없고 식수대 하나가 전부인 이 아틀리에 건물을 "세탁선"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자코브였다. 그는 건물을 처음 보았을 때 널려 있던 세탁물에서 센 강의 세탁선을 떠올렸다고 한다.[20] 자코브는 훗날 "세탁선"을 "회화의 중앙 실험실"이라고 불렀는데,[21] 이는 이곳이 피카소,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등 전위 예술가들의 활동 중심지였고, 특히 1907년 피카소가 큐비즘의 시작을 알린 기념비적인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린 장소였기 때문이다.[22]

몽마르뜨 시절, 자코브는 미술 평론가 André Salmon|앙드레 살몽프랑스어을 만났고, 피카소를 통해 아폴리네르와도 친분을 쌓았다. 그는 장 콕토, 장 위고, 크리스토퍼 우드, 모딜리아니와도 가까운 친구가 되었으며, 모딜리아니는 1916년에 그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또한 예술가 로마냉, 즉 훗날 레지스탕스의 지도자가 되는 정치인 장 물랭과도 친구가 되어 그를 격려했다. 물랭의 유명한 가명 '맥스'는 자코브를 기리기 위해 선택된 것으로 추정된다.
1904년, 자코브는 첫 작품인 아동 문학 단편집 『카부르 왕 1세와 견습 요리사 고방의 이야기』를 자비 출판했다.[23] 같은 해, 어린이 잡지에 연재했던 단편을 모아 『태양의 거인』을 아셰트 출판사의 자회사를 통해 출간했다.[24] 1907년에는 독일 출신 화상 다니엘앙리 칸바일러가 파리 9구 Rue Vignon|비뇽 거리프랑스어에 화랑을 열고 자코브의 "마토렐 3부작" 중 첫 작품인 소설 ''Saint Matorel''(1911)을 출판하는 등 그를 지원했다.[28][29]
1908년부터 1909년 사이, 자코브는 "세탁선"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몽마르뜨의 보헤미안 예술가들과 폭넓은 교류를 가졌다. 피카소, 살몽, 아폴리네르, 마리 로랑생 외에도 화가 모리스 위트릴로, 쉬잔 발라동, 키스 반 동겐, 후안 그리스, 루이 마르쿠시, 자크 빌롱, 오토 프로인트리히, Henri Hayden|앙리 에당프랑스어, Henri Laurens|앙리 로렌스프랑스어, 모리스 드 블라맹크, 앙드레 드랭, 라울 뒤피, 작가 Pierre Mac Orlan|피에르 마크 오를랑프랑스어, 쥘 로맹, 조르주 뒤아멜, 폴 포르, Francis Carco|프란시스 카르코프랑스어, Roland Dorgelès|롤랑 도르젤레스프랑스어, André Warnod|앙드레 바르노프랑스어, 배우 샤를 뒤랑, Harry Baur|해리 보어프랑스어 등 수많은 인물들과 친분을 맺었다.[10] 당시 이들은 주로 프레데릭 제라르가 운영하는 카바레 "오 라팽 아질"에 모여 교류했으며, 이는 전위 예술의 중심지가 몽마르뜨에서 몽파르나스로 옮겨가기 전의 전성기였다.[30] 1908년에는 "세탁선"에서 피카소의 제안으로 자코브, 아폴리네르, 로랑생 등이 당시 인정받지 못했던 소박파 화가 앙리 루소를 기리는 연회를 열기도 했다.[25][26] 이듬해 루소는 아폴리네르와 로랑생을 모델로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를 그렸고, 자코브는 1910년 두 사람을 그린 수채화 《기욤 아폴리네르와 그의 뮤즈》를 발표했다.[27]
유대인이었던 자코브는 1909년 그리스도의 환상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며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는 이 개종을 통해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이 완화되기를 바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3] 그의 작품 중 산문 시집 ''Le cornet à dés'' (''주사위 상자'', 1917)는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를 잇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1928년, 자코브는 파리에서의 활동을 재개하여 잠시 5구에 머물다 17구의 Rue Nollet|노레 거리프랑스어로 이사하여 6년간 거주했다. 그는 화가로서 자립을 시도하며, 1930년 동향 출신 피에르 콜과 화상 Jacques-Paul Bonjean|자크폴 봉장프랑스어의 도움으로 파리와 뉴욕에서 개인전을 열었다.[13] 이 시기 그가 살던 지역에는 작곡가 앙리 소게, 인도학자이자 음악학자인 알랭 다니엘루, 훗날 유명 디자이너가 되는 크리스찬 디올(당시 화랑 운영), 화가 Christian Bérard|크리스티앙 베라르프랑스어 등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살며 과거 몽마르뜨와 같은 활기를 띠었다. 자코브는 당시 20대였던 소게를 위해 오페레타 '티치아노의 사랑'의 대본을 써주는 등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했다.[52]

1929년, 피에르 콜과 함께 차를 타고 브르타뉴로 가던 중 교통 사고를 당해 캉페르의 가족 곁에서 요양하게 되었다. 이때 캉페르에서 활동하던 영국 출신의 젊은 화가 크리스토퍼 우드를 만나 교류했으며, 우드는 《막스 자코브의 초상》(1929)을 그렸다. 하지만 이듬해인 1930년, 솔즈베리로 돌아간 우드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자코브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13]
2. 3. 개종과 은둔
유대인이었던 야코프는 1909년 그리스도의 환시를 경험했다고 주장하며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는 이러한 개종이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완화시켜 주기를 바랐다고 전해진다.[3]막스 자코브는 두 차례에 걸쳐 견신 체험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철학, 신비주의, 점성술, 카발라(유대교 신비주의 사상)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탐독한 영향도 거론되지만[10], 첫 번째 체험은 1909년 9월 7일에 일어났다. 그가 거주하던 바토 라부아르("세탁선")로 돌아왔을 때 벽에 그리스도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 경험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다음 날 인근의 몽마르트르 생 장 교회를 찾아가 사제에게 세례를 받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당시 몽마르트르 예술가들의 자유분방한 생활을 알고 있던 사제는 그의 요청을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번째 체험은 1914년 12월, 영화관에서 이루어졌다. 이를 계기로 신의 존재를 더 이상 의심할 수 없게 된 자코브는 1915년 2월 18일, 파리 6구에 위치한 노트르담 드 시옹 수도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대부는 피카소였으며, 세례명은 키프리아누스로 정해졌다.[16] 키프리아누스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박해 속에서 순교한 카르타고의 성인이다.[31] 피카소는 장난삼아 '피아크르'라는 세례명을 제안하기도 했는데,[16] 피아크르는 아일랜드 출신의 은둔자이자 정원사와 마부의 수호 성인이다. 그러나 이 성인의 이름에서 유래한 숙박시설 '생-피아크르'가 프랑스어로 마차를 뜻하는 '피아크르'의 어원이 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단순히 '마차'를 의미하는 단어로 쓰인다.[32][33]
가톨릭 세례를 받은 후, 막스 자코브는 두 차례에 걸쳐 생브누아쉬르루아르(로레현, 중앙-루아르 계곡 지역)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파리에서 남쪽으로 약 150km 떨어진 이곳에는 생브누아쉬르루아르 수도원(플뢰리 수도원)이 있으며, 그는 이곳에서 기도와 창작 활동에 전념했다. 첫 번째 은둔 시기는 1921년부터 1928년까지였고, 두 번째는 1936년부터 게슈타포에 체포되기 직전인 1944년까지 이어졌다. 은둔 생활 중에도 그는 다니엘 헨리 칸바일러, 장 콕토, 피카소, 모이즈 키슬링, 앙드레 살몽 등 기존의 친구들은 물론, 롤랑-마뉘엘, 미셸 레리스, 아르망 살라크루, Marcel Jouhandeau|마르셀 주앙도프랑스어, René Rimbert|르네 랭베르프랑스어, Élie Lascaux|엘리 라스코프랑스어 등 여러 인물들과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았다.
2. 4. 제2차 세계 대전과 죽음
1933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를 수훈[53]하고 프랑스 지방과 세계 각국에서 강연회를 열었다. 1936년 5월, 파리 외곽으로 이주하여 루아레의 생-브누아-쉬르-루아르에 정착했다.[5] 그는 이곳에 은거하며 파리로 돌아가지 않았지만, 화가 로제 툴루즈, 시인 미셸 마놀, 마르셀 베알루, 장 부이에르, 르네 기 카두 등 젊은 인재들을 발굴하고 교류했다. 로제 툴루즈는 《막스 자코브의 초상, 또는 난초가 있는 초상》(캄페르 미술관 소장)을 그리기도 했다.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나치 독일은 반 나치적 서적과 유대인 저자의 출판을 금지하고 엄격한 검열을 시행했다. 주불 독일 대사 오토 아베츠는 유대인 작가와 반 나치 작가의 저서를 금지하는 금서 목록인 오토 리스트를 발표했는데, 이 목록에는 막스 자코브의 마지막 시집 『발라드』(1938년 발표)도 포함되었다.[54] 같은 해, 막스 자코브는 유언을 작성하고 친구 피에르 콜을 유언 집행자로 지정했다. 그는 시인 에드몽 자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이 세상을 넘어섰다. 순교자가 되는 것을 달게 받겠다"라고 썼다.[55]
1942년 6월, 비시 정권은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다비드의 별 착용을 의무화했다. 많은 친구들이 자코브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거나 자유 지역으로의 도피, 위조 신분 증명서 마련 등을 제안했지만, 그는 모두 거절하고 스스로를 "유대인 부모와 조부모를 둔" 프랑스인으로 등록했다.[10] 나치의 유대인 탄압은 그의 가족에게도 미쳤다. 형 가스통은 1942년 12월 캉페르에서 체포되어 1943년 2월 아우슈비츠로 강제 이송되었다.[10] 누이동생 미르트-레아는 1944년 1월 파리에서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드랑시 수용소를 거쳐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고, 도착 직후 가스실에서 살해되었다.[10] 그녀의 남편 역시 나치에 의해 이송되었으며, 사촌 앙드레 자코브만이 가명을 사용하며 행정부 내부 교란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여 생존했다.[6]
1944년 2월 24일, 막스 자코브 자신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오를레앙 감옥에 죄수 번호 15872번으로 수감되었다.[5] 4일 후인 2월 28일, 그는 드랑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다음 호송을 기다리던 중 기관지 폐렴을 앓게 되었고, 결국 1944년 3월 5일 수용소 내 양호실에서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7]
전쟁이 끝난 후, 그의 유해는 처음에는 이그리-쉬르-센의 공동 묘지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1949년 3월 5일, 그의 예술가 친구들인 장 카수와 조각가 르네 이셰(자코브의 묘비를 조각함)의 노력으로 정식 장례식이 거행된 후, 유해는 그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생-브누아-쉬르-루아르의 묘지로 이장되었다.[6][56] 1960년 11월 17일, 프랑스 정부는 막스 자코브를 "프랑스를 위해 죽음"으로 공식 인정하고 호적에 기록했다. 통상 이러한 인정은 가족의 신청으로 이루어지지만, 자코브에게는 신청할 가족이 남아있지 않아 오를레앙 시장이 대신 신청했다.[56]
1949년 3월 5일에는 "막스 자코브 친구회"가 결성되었다. 초대 명예 회장은 피카소였으며, 이사 회원으로는 오를레앙 주교 쿨쿠 추기경, 알베르 풀로 교회 참사회원, 예술가 동료인 폴 클로델, 장 콕토, 장 폴랭, 루이 기유, 줄리앙 라노에, 모리스 모렐, 앙드레 살몽, 장 폴랑, 앙리 소게(회장 겸임), 그리고 동생 자크 자코브 등이 참여했다.[57]
3. 작품 세계
막스 자코브는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사이의 중요한 연결 고리로 평가받는다. 그의 작품 세계는 시, 소설, 평론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특히 산문시 분야에서 독창적인 성취를 이루었다.
대표작으로는 산문시집 Le Cornet à dés|주사위 통프랑스어(1917)이 꼽힌다. 이 작품은 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아 구어와 속어를 자유롭게 사용하고, 날카로운 풍자와 유쾌한 조소, 해학적인 농담을 통해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39] 제목 '주사위 통'은 제한된 형식 안에 무한한 우연성을 담아내려는 작가의 의도를 상징하며, 미셸 레리스는 이것이 입체주의 회화에 자주 등장하는 주사위 모티프와 예수의 수난을 동시에 연상시킨다고 해석했다.[38] 1948년 갈리마르에서 출간된 판본에는 장 위고가 삽화를 그렸다.
자코브의 다른 주요 저서로는 소설 Saint Matorel|성 마토렐프랑스어(1911), 자유시집 Le laboratoire central|중앙 실험실프랑스어(1921), 그리고 그의 철학적, 종교적 태도를 엿볼 수 있는 La défense de Tartuffe|타르튀프의 옹호프랑스어(1919) 등이 있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그는 무의식, 꿈, 환각 등 정신세계를 탐구하며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를 예견하는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36]
그의 작품 세계는 파블로 피카소, 기욤 아폴리네르,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장 콕토 등 동시대 예술가들과의 깊은 교류 속에서 형성되었다. 특히 피카소와는 오랜 우정을 나누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자코브는 피카소에게 아폴리네르를, 아폴리네르는 다시 피카소에게 조르주 브라크를 소개해주는 등 당시 파리 예술계의 중심 인물들과 교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자코브는 그림에도 재능을 보여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열었으며, 과슈 작품이 특히 유명하다. 그의 예술적 탐구와 사상은 후대의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은 "진실은 항상 새롭다"는 말을 자코브의 것으로 인용하기도 했다.[4]
3. 1. 시
1909년경부터 고향 캉페르와 파리를 오가며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캉페르에서는 그 지방의 풍토를 그린 화가 피에르 드 블레[13]나 캉페르에 관한 저서로 알려진 작가 피에르 알리에(Pierre Allier)[34]와 교류했으며, 배우 노엘 로크베르의 가족이 캉페르에서 결성한 극단·서커스 "베네방"의 공연을 소개하는 글을 쓰는 등 지역 문화 활동에도 참여했다.[10] 1911년에는 브르타뉴를 노래한 시집 La Côte. Chants bretons|해안 - 브르타뉴의 노래프랑스어를 발표했고, 만년에는 피에르 알리에의 권유로 쓴 "브르타뉴 풍의" 시집 Poèmes de Morven le Gaëlique|게일인 몰반의 시집프랑스어은 브르타뉴 땅을 사랑하고 그곳에 은거한 생폴루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35]1911년부터 1914년까지는 성 마토렐 또는 수도사 마토렐을 주인공으로 하는 3부작을 발표했다. 이는 소설 Saint Matorel|성 마토렐프랑스어, 시집 Les Œuvres burlesques et mystiques de Frère Matorel, mort au couvent de Barcelone|바르셀로나 수도원에서 죽은 수도사 마토렐의 해학적이고 신비로운 작품프랑스어, 그리고 피카소의 삽화가 들어간 희곡 Le Siège de Jérusalem‚ grande tentation céleste de Frère Matorel|예루살렘 공방전 - 성 마토렐의 위대한 신의 유혹프랑스어으로 구성된다. 이 작품들은 모두 칸바일러가 출판했다. 무의식, 꿈, 환각 등 정신 세계를 탐구하는 이 작품들은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의 선구적인 시도로 평가받으며, 특히 켈트의 드루이드 신앙과 유사한 신비 사상이 두드러진다.[36]
이러한 정신 세계 탐구는 1917년에 발표된 산문시집 Le Cornet à dés|주사위 통프랑스어에서 결실을 맺었다. "코르네 아 데(Cornet à dés)"는 주사위를 넣고 흔들어 굴리는 통을 의미한다.[37] 미셸 레리스는 1945년 갈리마르판 서문에서 이 제목이 "제한적인 것" 안에 "무한한 우연"이 담겨 있음을 시사하며, 주사위가 큐비즘 회화에 자주 등장하는 동시에 고대 로마 병사들이 그리스도의 옷을 얻기 위해 주사위 놀이를 한 것과 연결되어 그리스도의 수난을 연상시킨다고 설명했다.[38]
아사노 아키라는 막스 자코브를 아폴리네르와 함께 "입체파(큐비즘)를 대표하는 특이한 시인"으로 평가했다. 그는 시에서의 큐비즘이 "구시대적인 작시법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운율과 구어·속어의 사용을 통해 이미지의 절대적 자유를 확립하고 '새로운 현실'을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막스 자코브의 시는 "날카로운 풍자와 유쾌한 조소, 해학적인 농담으로 가득하다"고 덧붙였다.[39]
1913년 바캉스는 피카소, 브라크, 후안 그리스와 함께 스페인 국경 근처 세레(피레네조리앙탈주)에서 보냈다. 현재 세레 현대 미술관이 된 건물은 당시 "세탁선"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이탈리아와 스페인 화가들, 특히 큐비스트들의 또 다른 활동 중심지였다. 1916년 이후에는 주로 라 뤼슈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몽파르나스의 전위 화가들, 특히 소련이나 중동유럽에서의 탄압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한 유대인 화가 모이즈 키슬링, 샤임 수틴, 마르크 샤갈, 핑크스 크레메뉴 등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40] 막스 자코브와 피카소는 더 나아가 피카소의 고향인 스페인 피게라스를 방문했다. 특히 카탈루냐의 민속 무용인 사르다나에 깊은 감명을 받은 자코브는 시집 Le Laboratoire central|중앙 실험실프랑스어(1921년 간행)에 수록된 시 "사르다나와 테노라의 영광"을 피카소에게 헌정했다.[41]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건강 문제로 입대는 면제되었지만[10], 파리에 머물며 징집된 친구들과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았다. 1916년에는 골동품 수집가 조제프 아르투니안에게 헌정하는 시를 담은 소책자 Les Alliés sont en Arménie|연합국은 아르메니아에 있다프랑스어를 발표했다. 이즈미르 출신의 아르메니아계 터키인 아르투니안은 1908년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피해 프랑스로 이주했으며, 자코브뿐 아니라 피카소, 아폴리네르, 모딜리아니 등 "세탁선"의 다른 예술가들과도 친분을 쌓았다. 그는 조르주 클레망소를 통해 오귀스트 로댕과 알게 되어 로댕의 의뢰로 고대 이집트 조각을 수집했으며, 이 컬렉션의 일부는 현재 로댕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2019년에는 아르투니안 컬렉션 약 400점(총액 100만유로)이 모두 파리의 아르퀴리알에서 경매에 부쳐졌다. 컬렉션에는 아르투니안의 초상 등 모딜리아니의 소묘도 몇 점 포함되어 있었는데, 당시 가난했던 모딜리아니로부터 헐값에 사들인 것이었지만, 1920년에 사망한 모딜리아니를 대신하여 막스 자코브가 "모딜리아니가 1917년에 그린 아르투니안의 초상임을 증명한다"고 제작 현장에 있던 사람으로서 증언했다.[42][43][44][45] 막스 자코브의 시집 『연합국은 아르메니아에 있다』는 세례명 키프리아누스의 C를 더한 "C. 막스 자코브"라는 필명으로 "아르메니아에 대한 오마주"로서 제작되었으며, 비매품이었지만, 1922년에 누벨 르뷔 프랑세즈 (''NRF'') 출판사에서 간행된 마리 로랑생의 판화 작품집 『부채』에 재수록되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이 작품집에는 로제 알라르, 앙드레 브르통, 프란시스 카르코의 시도 게재되었다.[46]
전시 중이었지만, 파리에서는 전위 예술 운동이 잇달아 일어났다. 막스 자코브는 1917년 3월에 아폴리네르, 피에르 르베르디와 함께 잡지 Nord-Sud|남북프랑스어을 창간했다. 잡지명은 1910년에 파리의 두 전위 예술가·문학가의 활동 거점 몽마르트르(파리 북부, "세탁선")와 몽파르나스(파리 남부, "라 뤼슈")를 잇는 지하철이 개통된 것에 연유하여 명명되었으며, 이 두 거점을 연결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발행 부수는 100~200부로 적었지만, 1917년 3월 15일부터 1918년 10월까지 총 16호가 간행되었으며, 처음에는 큐비즘의 잡지, 다음에는 다다이즘, 더 나아가 초현실주의의 선구로 여겨지는 전위 예술·문학 잡지였다. 막스 자코브는 매번, 시나 단편을 게재했다. "십자가에 매달린 자의 다섯 번째 상처와 니체의 '비극적인 앎'", "심리적 의식과 십자가에 매달린 자의 다섯 번째 상처", "연극과 영화" 등 시적인 표현에 의한 논고도 발표했다.[47][48] Nord-Sud|남북프랑스어지에는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운동을 견인하게 되는 앙드레 브르통, 루이 아라공, 필립 수포, 트리스탄 차라도 기고했지만, 막스 자코브는, 1919년 2월에 브르통, 아라공, 수포에 의해 창간되어, 다다이즘의 기관지가 된 Littérature|리테라튀르 (문학)프랑스어지에도, 《모나리자》 도난 혐의를 받은 아폴리네르를 격려하고 지원하기 위해, 새로운 활동의 장으로서 창간된 Les Soirées de Paris|레 소와레 드 파리프랑스어의 제2시리즈(아폴리네르가 주재)에도 기고하는 등[49], 많은 전위 예술 운동에 관여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막스 자코브는 많은 젊은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했다. 1919년에는 아직 16세였던 레이몽 라디게의 시를 평가하고, 장 콕토에게 소개했다(콕토는 1923년 라디게의 요절에 깊은 정신적 타격을 받았다). 회화나 문학뿐만 아니라 음악에서도, 파리에서 활동을 시작한 재즈 뮤지션을 평가하고, 6인조 (프랑시스 풀랑크, 제르멘 타유페르, 루이 뒤레, 다리우스 미요, 아르튀르 오네게르, 조르주 오리크) 및 피아니스트 마르셀 메이에르와 남편이자 배우인 피에르 베르탱과 친교를 맺고, 희곡, 오페라, 오페라 부프를 제작하는 등 젊은 음악가를 지원했다. 1922년에는 작곡가 롤랑-마뉘엘을 위해 오페라 부프 Isabelle et Pantalon|이자벨과 판탈롱프랑스어의 대본(리브레토)을 쓰고, 18구의 극장 트리아농 리릭(현르 트리아농)에서 상연되었다.[50]
1921년에는 파리의 화랑에서 막스 자코브의 과슈를 중심으로 한 개인전이 열렸다. 또한, 대전 중에 휴간되었던 Nouvelle Revue Française|누벨 르뷔 프랑세즈프랑스어 (''NRF'')지가, 1919년 6월에 신 편집장 자크 리비에르 하에서 활동을 재개했고, 동 잡지의 기고자로 후에 편집장을 맡게 되는 장 폴랑의 중개를 통해, 이후, 막스 자코브의 저서는 누벨 르뷔 프랑세즈 출판사(갈리마르 출판사)에서 간행되게 되었다.[13]
=== 주요 시집 목록 ===
아래는 막스 자코브의 주요 시집 목록이다 (초판 기준). 이후 많은 저서가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재간행되었다.
한국어 제목(가제) | 원제 | 서지 정보 |
---|---|---|
『해안 - 브르타뉴의 노래』 | La Côte. Chants bretons | 1911 (자비 출판) |
『바르셀로나 수도원에서 죽은 마토렐 수사의 해학적이고 신비로운 작품』 | Les Œuvres burlesques et mystiques de Frère Matorel, mort au couvent de Barcelone | Kahnweiler, 1912 (마토렐 3부작 중 시집) |
『주사위 통』 | Le Cornet à dés | 1917 (자비 출판) |
『연합군은 아르메니아에 있다』 | Les Alliés sont en Arménie | 1918 (아르메니아에 대한 오마주, 소책자, 비매품) |
『중앙 실험실』 | Le Laboratoire central | Au Sans-Pareil, 1922 |
『지옥의 환영』 | Visions infernales | Gallimard, 1924 |
『장밋빛 수영복의 참회자들』 | Les Pénitents en maillots roses | Le Sagittaire / Simon Kra, 1925 |
『수저』 | 'Fond de leau'' | Les Cahiers libres, 1927 |
『당당한 희생』 (황제의 제물) | Sacrifice impérial | Les Frères Émile Paul, 1929 |
『기슭』 | Rivage | Les Cahiers libres, 1931 |
『발라드』 | Ballades | René Debresse, 1939 |
『마지막 산문시·운문시』 | Derniers poèmes en vers et en prose | Gallimard, 1945 (사후 출간) |
『맑고 깨끗한 남자』 | 'LHomme de cristal'' | La Table ronde, 1946 (사후 출간) |
『게일인 모르번의 시집』 | Poèmes de Morven le Gaëlique | Gallimard, 1953 (사후 출간) |
3. 2. 소설
한국어 제목 (가제) | 원제 | 서지 정보 |
---|---|---|
『카불 1세 왕과 견습 요리사 고뱅 이야기』 | Histoire du roi Kaboul Ier et du marmiton Gauwain프랑스어 | Alcide Picard & Kaan, 1904 (아동 문학) |
『태양의 거인』 | Le Géant du Soleil프랑스어 | Librairie générale, 1904 (아동 문학) |
『성 마토렐』 | Saint Matorel프랑스어 | Kahnweiler, 1911 (마토렐 3부작) |
『종자식물』 | Le Phanérogame프랑스어 | 1918 (자비 출판) |
『시네마토마』 | Cinématoma프랑스어 | La Sirène, 1920 |
『보이오티아』 | Le Roi de Béotie프랑스어 | Gallimard, 1921 (아동 문학) |
『끊지 마세요, 아가씨, 혹은 P. T. T의 실수』 | Ne coupez pas, Mademoiselle, ou les Erreurs des P. T. T.프랑스어 | Kahnweiler, 1921 (철학적 코미디) |
『검은 서재』 | Le Cabinet noir프랑스어 | Gallimard, 1922 (서간 소설) |
『필리뷔 또는 금시계』 | Filibuth ou la Montre en or프랑스어 | Gallimard, 1922 |
『불카누스의 왕관』 | La Couronne de Vulcain프랑스어 | Kahnweiler, 1923 (아동 문학) |
『살아있는 인간과 거울 속의 인간』 | LHomme de chair et lHomme reflet프랑스어 | Le Sagittaire / Simon Kra, 1924 |
『프랑스와 그 밖의 부르주아』 | Bourgeois de France et d'ailleurs프랑스어 | Gallimard, 1932 |
3. 3. 기타
- 《Le Cornet à dés|주사위 통프랑스어》
- 《Le Laboratoire central|중앙 실험실프랑스어》
- 《Poèmes de Morvan le Gaëlique|모르방 시집프랑스어》
- 《La Défense de Tartufe|타르튀프의 옹호프랑스어》
- 《Saint Matorel|성 마토렐프랑스어》
- 《Le Sacrifice impérial|황제의 제물프랑스어》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막스 자코브는 건강상의 이유로 입대를 거부했지만[10], 파리에 머물며 징집된 친구들과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았다. 1916년에는 골동품 수집가 조제프 아르투니안에게 헌정하는 시를 담은 소책자 《연합국은 아르메니아에 있다》를 발표했다. 아르투니안은 이즈미르에서 태어난 아르메니아계 터키인으로, 1908년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피해 프랑스로 이주한 인물이다. 그는 막스 자코브뿐 아니라 피카소, 아폴리네르, 모딜리아니 등 "세탁선"의 다른 예술가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조르주 클레망소를 통해 오귀스트 로댕과 알게 되어 로댕의 의뢰로 고대 이집트 조각을 수집하기도 했는데, 이 중 일부는 현재 로댕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2019년에는 아르투니안 컬렉션 약 400점(총액 100만유로)이 파리의 아르퀴리알(Artcurial)에서 경매에 부쳐졌다. 이 컬렉션에는 아르투니안의 초상 등 모딜리아니의 소묘 몇 점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당시 가난했던 모딜리아니로부터 헐값에 사들인 것이었다. 1920년 모딜리아니가 사망하자, 막스 자코브는 제작 현장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모딜리아니가 1917년에 그린 아르투니안의 초상임을 증명한다"고 증언했다.[42][43][44][45] 막스 자코브의 시집 《연합국은 아르메니아에 있다》는 세례명 키프리아누스의 C를 더한 "C. 막스 자코브"라는 필명으로 "아르메니아에 대한 오마주"로서 제작되었으며, 비매품이었으나 1922년 누벨 르뷔 프랑세즈 (''NRF'') 출판사에서 간행된 마리 로랑생의 판화 작품집 《부채》에 재수록되어 처음 공개되었다. 이 작품집에는 로제 알라르(Roger Allard), 앙드레 브르통, 프란시스 카르코의 시도 함께 실렸다.[46]
전쟁 중에도 파리에서는 전위 예술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막스 자코브는 1917년 3월, 아폴리네르, 피에르 르베르디와 함께 잡지 《Nord-Sud|남북프랑스어》을 창간했다. 잡지명은 1910년 파리의 두 전위 예술 거점인 몽마르트르(파리 북부, "세탁선")와 몽파르나스(파리 남부, "라 뤼슈")를 잇는 지하철 노선 개통에서 유래했으며, 두 거점을 연결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발행 부수는 100~200부로 적었지만, 1917년 3월 15일부터 1918년 10월까지 총 16호가 간행되었다. 초기에는 큐비즘 잡지로 시작하여 이후 다다이즘, 나아가 초현실주의의 선구로 평가받는 전위 예술·문학 잡지였다. 막스 자코브는 매호 시나 단편을 게재했으며, "십자가에 매달린 자의 다섯 번째 상처와 니체의 '비극적인 앎'", "심리적 의식과 십자가에 매달린 자의 다섯 번째 상처", "연극과 영화" 등 시적인 표현을 사용한 논고도 발표했다.[47][48] 《남북》지에는 이후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운동을 이끌게 되는 앙드레 브르통, 루이 아라공, 필립 수포, 트리스탄 차라 등도 기고했다. 막스 자코브는 1919년 2월 브르통, 아라공, 수포가 창간하여 다다이즘의 기관지가 된 《리테라튀르 (문학)》지와, 《모나리자》 도난 혐의를 받은 아폴리네르를 격려하고 지원하기 위해 아폴리네르가 주재한 《레 소와레 드 파리》 제2시리즈에도 기고하는 등[49], 여러 전위 예술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막스 자코브는 많은 젊은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했다. 1919년에는 당시 16세였던 레이몽 라디게의 시를 높이 평가하고 장 콕토에게 소개했다(콕토는 1923년 라디게의 요절로 큰 충격을 받았다). 회화나 문학뿐 아니라 음악 분야에서도 파리에서 활동을 시작한 재즈 뮤지션들을 격려하고, 6인조(프랑시스 풀랑크, 제르멘 타유페르, 루이 뒤레, 다리우스 미요, 아르튀르 오네게르, 조르주 오리크) 및 피아니스트 마르셀 메이에르와 그녀의 남편이자 배우인 피에르 베르탱(Pierre Bertin)과 교류하며 희곡, 오페라, 오페라 부프 제작을 돕는 등 젊은 음악가들을 후원했다. 1922년에는 작곡가 롤랑-마뉘엘을 위해 오페라 부프 《Isabelle et Pantalon|이자벨과 판탈롱프랑스어》의 대본(리브레토)을 썼고, 이 작품은 파리 18구의 극장 트리아농 리릭(현 르 트리아농)에서 상연되었다.[50]
1921년에는 파리의 한 화랑에서 막스 자코브의 과슈 작품을 중심으로 한 개인전이 열렸다. 또한, 제1차 세계 대전 중 휴간했던 《누벨 르뷔 프랑세즈 (''NRF'')》지가 1919년 6월 새로운 편집장 자크 리비에르 아래 활동을 재개했고, 잡지의 기고자이자 후에 편집장이 되는 장 폴랑의 중개로 이후 막스 자코브의 저서는 누벨 르뷔 프랑세즈 출판사(갈리마르 출판사)에서 간행되게 되었다.[13]
=== 주요 저서 ===
한국어 제목 (가제) | 원제 | 서지 정보 |
---|---|---|
《예루살렘 포위전 - 성 마토렐의 위대한 하늘의 유혹》 | Le Siège de Jérusalem‚ grande tentation céleste de Frère Matorel프랑스어 | 칸바일러, 1914. (마토렐 3부작, 피카소 삽화) |
《이자벨과 판탈롱》 | Isabelle et Pantalon프랑스어 | 1919 (오페라 부프 대본, 롤랑-마뉘엘 작곡) |
《아를르캥의 등》 | Dos d'Arlequin프랑스어 | Le Sagittaire / Simon Kra, 1921 |
《부샤발의 땅》 | Le Terrain Bouchaballe프랑스어 | Les Frères Émile Paul, 1922 |
《티치아노의 사랑》 | Un amour de Titien프랑스어 | 1928 (오페레타, 앙리 소게 작곡) |
그 외, 프랑시스 풀랑크가 막스 자코브의 시에 곡을 붙여 발표하기도 했다.[58]
=== 평론 및 에세이 ===
한국어 제목 (가제) | 원제 | 서지 정보 |
---|---|---|
《타르튀프 변호》 | La Défense de Tartuffe프랑스어 | 프랑스 문학 협회, 1919 |
《시학》 | Art Poétique프랑스어 | 레 프레르 에밀 폴, 1922 |
《부르주아지의 그림》 | Tableau de la Bourgeoisie프랑스어 | 갈리마르, 1929 (역사학, 사회학적 평론. 저자의 석판화, 소묘 다수 포함) |
《작품집》 | Morceaux choisis프랑스어 | 갈리마르, 1936 |
《종교적 묵상》 | Méditations religieuses프랑스어 | 라 타블 롱드, 1945 |
《점성술의 거울》 | Miroir d'astrologie프랑스어 | 갈리마르, 1949 (공저) |
=== 서간집 ===
한국어 제목(가제) | 원제 | 서지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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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젊은 시인에게 주는 조언, 어떤 학생에게 주는 조언》 | Conseils à un jeune poète suivis de Conseils à un étudiant프랑스어 | Gallimard, 1945 |
《기욤 아폴리네르에게 보낸 미발표 서간》 | Lettres inédites du poète à Guillaume Apollinaire프랑스어 | Seghers, 1946 |
《장 콕토에게 보낸 서간 선집 1919-1944》 | Choix de lettres à Jean Cocteau. 1919-1944프랑스어 | Librairie Paul Morihien, 1949 |
《프랑수아 가르니에 왕복 서간 (제1권) 캉페르-파리 (1876-1921)》 | François Garnier, Correspondance, tome I "Quimper-Paris : 1876-1921"프랑스어 | Éditions de Paris, 1953 |
《프랑수아 가르니에 왕복 서간 (제2권) 생-브누아-쉬르-루아르 (1921-1924)》 | François Garnier, Correspondance, tome II "Saint-Benoit-sur-Loire : 1921-1924"프랑스어 | Éditions de Paris, 1956 |
《살라크루에게 보낸 서간 (1923년 8월 - 1926년 1월)》 | Lettres aux Salacrou. Août 1923 - janvier 1926프랑스어 | Gallimard, 1958 |
《르네 빌라르에게 보낸 서간, 격언집》 | Lettres à René Villard suivies du Cahier des Maximes프랑스어 | Rougerie, 1978 |
《리안 드 푸지에게 보낸 서간》 | Lettres à Liane de Pougy프랑스어 | Plon, 1980 |
《미셸 마놀에게 보낸 서간》 | Lettres à Michel Manoll프랑스어 | Rougerie, 1985 |
《니노 프랑크 왕복 서간》 | Correspondance avec Nino Franck프랑스어 | Peter Lang, 1989 |
《우정 ― 샤를 골드블라에게 보낸 서간》 | L'Amitié - Lettres à Charles Goldblat프랑스어 | Le Castor astral, 1994 |
《막스 자코브, 장 콕토 왕복 서간 1917-1944》 | Max Jacob, Jean Cocteau : correspondance 1917-1944프랑스어 | Paris Méditerranée, 2000 |
《장 폴랑에게 보낸 서간》 | Lettres à Jean Paulhan프랑스어 | Paris Méditerranée, 2005 |
《리오넬 플로크에게 보낸 서간》 | Lettres à Lionel Floch프랑스어 | Apogée, 2006 |
《우정과 애정 ― 서간집》 | Les Amitiés & les Amours : correspondances프랑스어 | L'Arganier, 2005 - 2006 (전 3권) |
《루이 기욤에게 보낸 서간》 | Lettres à Louis Guillaume프랑스어 | La Part Commune, 2007 |
《어떤 젊은 남자에게 보낸 편지 1941-1944》 | Lettres à un jeune homme 1941-1944프랑스어 | Bartillat, 2009 |
《막스 자코브, 앙드레 살몽 1905-1944》 | Max Jacob-André Salmon, 1905-1944프랑스어 | Gallimard, 2009 |
《막스 자코브가 쓴 ― 6명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 (샤를 울몽, 루이 바야, 장 카수, 르네 이셰, 루이 뒤물랭, 마르셀 메티비에)》 | Max Jacob écrit. Lettres à six amis. Charles Oulmont, Louis Vaillant, Jean Cassou, René Iché, Louis Dumoulin, Marcel Métivier프랑스어 | Presses universitaires de Rennes (PUR), 2015 |
=== 한국어 번역 ===
- 《주사위 통 - 산문시집》, 키타가와 후유히코 역, 후생각 서점, 1929년; 유마니 서방(현대의 예술과 비평 총서 3) 1994년 (일본어 중역)
- 《시법》(시법 / 근대시 / 햄릿시즘 / 위인과의 교제 / 기독교 예술), 호리구치 다이가쿠 역, 제일서방, 1931년 (일본어 중역)
- 《점성술의 거울》(클로드 발랑스 공저), 코하마 토시로(小浜俊郎) 역, 국문사, 1977년 (일본어 중역)
막스 자코브의 시가 번역되어 실린 기타 저서 (일본어 중역 포함)
4. 주요 작품 목록
- 주사위 통 Le Cornet à désfra
- 중앙 실험실 Le Laboratoire centralfra
- 모르방 시집 Poèmes de Morvan le Gaëliquefra
- 타르튀프의 옹호 La Défense de Tartufefra
- 성 마토렐 Saint Matorelfra
- 황제의 제물 Le Sacrifice impérialfra
5. 평가 및 영향
막스 자코브는 상징주의자와 초현실주의 사이의 중요한 연결 고리로 여겨진다. 그의 이러한 문학사적 위치는 산문 시집 ''Le cornet à dés'' (''주사위 상자'', 1917년)에서 잘 드러나며, 이 작품은 1948년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장 위고의 삽화와 함께 재출간되기도 했다. 또한 그는 화가로서도 활동하여 1930년과 1938년 뉴욕 시에서 그림 전시회를 열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소설 ''Saint Matorel'' (1911), 자유시 형식의 시집 ''Le laboratoire central'' (1921), 그리고 자신의 철학적, 종교적 태도를 설명하는 ''La défense de Tartuffe'' (1919) 등이 있다.
자코브는 동시대 예술가들과 폭넓게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받았다. 특히 파블로 피카소와는 평생에 걸친 우정을 나누었으며, 피카소가 파리에 처음 정착했을 때 프랑스어를 가르쳐 주는 등 도움을 주었다.[1][2] 그는 피카소에게 기욤 아폴리네르를 소개했고, 이는 다시 조르주 브라크와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또한 장 콕토, 장 위고, 크리스토퍼 우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등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지도자이자 예술가였던 장 물랭(예술가명 로마냉)과도 친구였으며, 물랭의 유명한 가명 '맥스'는 자코브를 기리기 위해 선택된 것으로 추정된다.
후대의 사상가에게도 영향을 미쳤는데,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진실은 항상 새롭다"라는 말을 자코프의 것으로 인용하기도 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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